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 이유 - 매일경제

 지난 몇 달 동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우크라이나 사태가 결국 전쟁으로 결론 났다. 지난 2월 초,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이 2월16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공식 발표했다. 이 발언으로 세계의 금융, 에너지 산업은 흔들렸고 외국인의 우크라이나 탈출이 본격화되었다.





▶세계의 화약고로 떠오른 ‘키예프 루스’

2월16일 러시아는 국경 지대에 배치한 탱크 등 중무기의 철수 모습을 보여주며 미국의 예측이 빗나갔음을 세계에 알렸다. 하지만 정보 자산을 총동원해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리고 결국 지난 2월21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친 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선포한 독립 국가 선언을 승인하며 후속 조치로 이 지역의 분쟁 완화와 돈바스 지역 약 400만 명에 이르는 시민의 안전, 특히 러시아계 시민 보호를 목적으로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돈바스 진입을 승인했다. 2월24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에서 러시아 군의 군사 작전을 승인, 돈바스 지역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크림반도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향해 미사일 발사와 지상군을 투입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EU회원국들은 돈바스 지역 두 곳의 친 러시아 국가인 자칭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분리 독립 승인을 거부했다. 하지만 세계의 언론과 학자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러시아는 이 돈바스 지역에서의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 러시아 반군과의 분쟁을 이유로 군사행동을 할 것’이라 예측했었다. 미국과 EU는 러시아에 대한 신규 투자, 무역, 은행 거래 정지 등을 금지하는 본격적인 경제 제재를 시작하며 세계 국가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의 경제 및 금융 제재, 국제 사회의 비판을 무릅쓰면서까지 왜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것일까. 단순히 푸틴의 국내 정치 돌파용 혹은 구 소련의 영광을 재현하고픈 야망의 발로만은 아니다. 이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러시아의 현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와 뿌리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광대한 국가이다.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약 78배 크기인 약 1709만㎢로 세계에서 가장 넓으며, 인구는 1억4600만 명이다. 물론 전 국토의 약 70%가 불모지라 인구의 80%는 유럽과 인접한 서부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동토인 시베리아 등에 천연가스, 석유 등의 각종 자원이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러시아의 미래는 밝게 점쳐졌다. 인구의 대부분은 동슬라브인이다.

러시아는 자신들의 국가 기원을 약 9세기경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키예프 루스에서 찾는다. 이 키예프 루스가 현재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원인 셈이다. 즉 동슬라브인의 최초 국가가 바로 키예프 루스인 것이다. 키예프 루스는 ‘항해술이 뛰어난 키예프 사람’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의 대부분은 게르만족, 바이킹족, 투르크족, 몽골족 등 주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국가의 침략과 지배의 시간이었다. 그러다 9세기경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도시국가 연합체인 키예프 루스가 등장했다. 키예프가 지금의 국가 형태를 형성한 것은 바이킹의 후손인 올레크가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이다. 물론 도시국가 형태의 ‘공국公國’ 연합이었다. 이 키예프의 전성시대를 연 군주가 스뱌토슬라프이다. 그는 평생을 말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전쟁의 왕’으로 불린 군주이다. 그는 키예프 루스의 영토를 확장해 지금의 볼가강과 카스피해까지 진출해 비잔틴 제국과 맞닿은 국경선을 확보했다. 얼마 후, 스뱌토슬라프는 비잔틴 제국과 일전을 불사했지만 패하고 971년 비잔틴 제국과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윽고 스뱌토슬라프의 아들 블라디미르 대공이 즉위했다. 그는 키예프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시킨 군주이다. 블라디미르는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였고 본인 스스로 비잔틴 제국의 공주와 결혼해 이후 러시아 정교회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1036년에 즉위한 블라디미르의 아들 야로슬라프는 키예프를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그는 법전을 정비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지어 국민을 계도했다. 후에 역사가들은 야로슬라프를 ‘현자’라 불렀다. 하지만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는 13세기 초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끝났다. 야로슬라프의 손자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때부터 키예프는 분열하기 시작했고 1240년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후 몇 세기 동안 키예프의 후손들 즉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의 동슬라브인들은 국가가 없는 시간을 지냈다. 이후 몽골 제국이 멸망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은 오스트리아 등 주변 강국의 분할 통치에 들어갔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주변 지역을 모두 장악했으며, 그들은 몽골 제국에 세금을 내는 대신 지역 지배권을 유지했다. 그 뒤 17세기 폴란드 지배 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위해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 시기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배와 간섭이 시작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우크라이나는 독립 국가를 건국할 기회를 얻었지만 당시 프랑스가 폴란드의 서 우크라이나 지역의 병합을 용인함으로써 그 기회도 상실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크라이나는 비로소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독립했지만 역시 소련의 위성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러시아는 제국으로 발전했다. 약 15세기경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3세는 스스로를 차르 즉 황제라 칭하고 국가를 재정비해 17세기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 러시아는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대제의 확장 정책으로 서유럽 국가와 견줄 만한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하지만 로마노프 왕조의 부패와 무능으로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 제국은 멸망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 즉 구 소련은 1922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자카프카스 등을 포함한 연방을 출범시켰고 이 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15개 연방으로 늘어났다. 그 뒤 소련은 미국과 냉전시대를 이끌며 사회주의의 종주국 위치를 점했다. 이후 고르바초프, 옐친을 거치면서 시민 혁명과 사회주의 포기로 1991년 구 소련은 붕괴되고 러시아가 재탄생했다. 1999년 당시 옐친 대통령은 정보국장이던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하고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다. 푸틴은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이듬해 2000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푸틴은 4년 연임이 끝나는 2008년 대선에서 심복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그를 당선시켰다. 그리고 메드베데프는 푸틴을 총리로 임명했다. 이후 메드베데프는 대통령의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개헌을 실시한다. 2012년 푸틴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곧이어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도 폐지해 푸틴은 2036년까지 합법적으로 대통령 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 이후 푸틴 대통령은 강력한 러시아 재건을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미국과 세계를 주도했던 구 소련이다. 푸틴은 군비를 증강하고 천연가스, 석유 등 자원 수출을 통해 러시아를 국제무대의 주역으로 재등장시켰다. 푸틴은 체첸 지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전격적으로 병합하는 등 강력한 러시아의 재건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푸틴과 러시아로서는 지정학적 위치, 자원과 곡창 지대 혹은 정치군사적 역학관계의 중요성을 떠나서 슬라브족의 뿌리이자 기원인 우크라이나와 키예프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푸틴은 미국이 더 이상 세계 유일의 패권국을 유지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 시작은 아프가니스탄 철수였다. 20년 전쟁을 황급히 마무리하고 떠나는 미군의 모습에서 푸틴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도 미국의 지상군이 개입하지 않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또 중국의 강력한 부상으로 대만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가중되는 현 정세에서 미국이 대만과 우크라이나에서의 두 개의 전선을 형성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고 판단해 과감하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적 뿌리, 키예프 루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 사회에 공개적으로 표방하기 위해 이번 침공을 단행했다. 러시아와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원하는 첫 번째 이유는 러시아의 뿌리가 바로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민족, 종교에서 동질감이 있다. 물론 언어와 기타 문화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원래부터 러시아의 일부라는 인식을 감추지 않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키예프에서 분리한 형제국이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보다는 게르만, 투르크, 바이킹, 비잔틴 문화와 오랜 시간 교류하면서 우크라이나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동질적 뿌리 인식을 갖고 있는 반면 우크라이나인은 그렇지 않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기억은 좋지 않다. 그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 수많은 러시아 인을 이주시켰고 그로 인해 분쟁의 씨앗이 잉태됐다고 생각한다. 즉 돈바스 지역에 약 200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 인들이 이주하면서 이곳에서 친 러시아 분리 독립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영토인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곡창지대를 보유한 ‘유럽의 빵 공장’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런 지리적 이점의 수혜를 그동안 각종 수탈과 핍박을 통해 러시아가 가져갔다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가장 축복받은 비옥한 땅에서 벌어진 스탈린 시절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트라우마를 우크라이나인들은 잊지 않고 있다.


구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우크라이나는 실질적 독립을 했다. 철의 장막이 무너지자 그동안 소련의 영향권 안에 있던 동독은 서독과 통일하고 헝가리, 체코, 폴란드, 알바니아, 루마니아 등을 비롯해 발트해 3국 등은 러시아의 위성국에서 벗어났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여타의 동구권 국가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에 배치했던 약 1800여 기의 핵탄두. 이 숫자는 미국과 러시아에 이은 세계 3번째 핵보유국이 바로 우크라이나라는 뜻이다. 러시아는 물론이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우크라이나가 1800여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에 불안감을 표출했다. 해서 이들은 1994년 부다페스트 안정보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각서의 주된 내용은 우크라이나가 핵폭탄 1800여 개를 러시아에 넘기고 대신 미국, 영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존과 정치적 독립을 약속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결국 핵 대신 달러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부다페스트 각서는 말 그대로 각서. 즉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정보다는 구속력이 약한 약속일 뿐이다. 러시아는 핵탄두를 손에 넣었고, 미국과 영국은 우크라이나보다는 러시아가 핵탄두를 관리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해 각서를 써준 것이다. 이후 러시아는 국가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상태에서도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는 여전히 친 러시아계 주민들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 투쟁이 일어났다. 즉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 러시아계 반군의 전투가 끊이지 않은 것이다.

드디어 러시아가 구 소련급의 국력을 회복했다고 판단한 푸틴 대통령은 2014년 전격적으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에 대한 야망은 거의 집착 수준이었다. 이는 러시아가 부동항을 갖기를 원하는 오랜 역사의 결과였다. 크림반도 안에 있는 세바스토폴 항구는 바로 러시아 흑해함대의 주둔지. 러시아는 이 흑해함대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2014년 3월11일, 크림 자치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이 독립을 선포하고 이른바 ‘크림공화국’을 결성했다. 그리고 친 러 악쇼노프라가 크림 자치공화국 총리 자격으로 푸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푸틴은 흑해함대와 러시아 주민보호 명분으로 크림반도에 군대를 파병했다. 2014년 3월16일, 러시아와 합병을 내건 주민 투표를 실시했다. 당시 주민의 63%가 러시아계라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 투표 결과 95% 찬성으로 러시아와 크림공화국의 합병은 통과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이 크림공화국을 인정한 국가는 전 세계에서 8개국뿐이다. 러시아로서는 옛 소련의 영화를 재현하기 위한 첫 단추를 크림반도 주민들의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방법으로 이뤄낸 것이다.

2014년 당시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친러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정부의 진압에도 반정부 봉기를 계속해 드디어 야누코비치 정권이 물러나고 새로운 친 서방 정권이 들어섰다. 이 시민 운동이 바로 ‘유로마이단’이다. 물론 그 시작은 2008년 세계 경제위기였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국가 부도의 직격탄을 맞았다. 2013년 유럽연합과 IMF국제통화기금은 우크라이나에게 지원을 제안했지만 당시 친러 성향의 대통령은 러시아의 손을 잡았고, 이에 분노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정권 축출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크림반도 합병에 자극받은 돈바스 지역 친러파들이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내전을 선포했다. 바로 돈바스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내전으로 약 1만4000명의 사상자와 약 1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에 2015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독일, 프랑스 등 4개국이 만나 분쟁 해결을 위한 민스크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민스크 협정은 사실 미봉책이다. 근본적인 해결 없이 협정을 체결, 그 이후에도 돈바스 지역에서의 내전은 끊이지 않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간접적인 간섭 역시 계속되었다.

▶미국과 나토의 동진을 막아라

나폴레옹, 히틀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두 사람은 권력으로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두 사람 모두 러시아, 소련에 대한 공격과 패전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 루트가 바로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노리는 자에게는 첫 번째 목표이자 러시아를 위협할 수 있는 목줄인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냉전체제에 접어들었다. 미국은 서유럽 재건을 위해 마샬플랜을 통해 막대한 달러를 쏟아부었고 또한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동맹을 결성했다. 바로 ‘NATO북대서양동맹’이다. 이 동맹은 회원국이 비회원국의 공격을 받으면 회원국들은 군사적으로 자동 개입하는 직접적인 미국의 안보 우산이다.

소련은 1955년 나토에 대항하기 위해 ‘WTO바르샤바조약기구’를 결성했다. 구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이 포함된 군사동맹체이다. 동독, 폴란드, 알바니아, 체코,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등이다. 1989년 치열했던 동서냉전이 종식되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유럽의 정치 지형이 급변한 것이다. 1990년 독일의 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서독, 동독이 모였다. 여기서 서독과 동독은 통일 과정과 그 이후에도 통일 독일을 비롯해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동진, 즉 소련을 향한 공격이나 위협은 없을 것이라는 협정을 체결했다. 구 소련 체제가 붕괴되면서 동유럽의 소련 위성국들은 줄줄이 독립했다. 이후 이 국가들의 행보는 바로 나토 가입으로 이어졌다. 1999년 헝가리, 폴란드 체코를 시작으로 2004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과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나토에 가입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는 바르샤바동맹국의 일원. 그리고 우크라이나 역시 나토의 31번째 회원국이 되기 위해 가입을 공식 선언했다. 그동안 러시아는 동맹 혹은 위성국들의 나토 가입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내의 국내 정치와 민족 문제 혹은 경제 및 군사적 재건이 더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러시아로서는 마지막 선이다. 러시아와 인접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조지아, 우크라이나 중에서 특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나토의 완충지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평원 지대. 특히 러시아와의 국경지대는 모두 평원으로 러시아로서는 이곳에 나토의 군사적 자원이 주둔하는 것은 러시아의 국경 방어에 치명적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우크라이나에 나토의 핵 자산과 미사일 시스템이 설치된다면 러시아로서는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는 위협인 셈이다. 우리나라에 사드가 배치되자 중국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우리에 대한 각종 제재를 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재정비를 마친 푸틴의 입장에서는 키예프를 포기할 수도 없고, 더구나 나토 회원국이 된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의 에너지 패권

21세기는 자원 전쟁의 시대이다. 이 자원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 바로 천연가스이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탈원전,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있다. 이에 가장 필요한 것이 천연가스, 즉 액화천연가스LNG이다. 러시아는 천혜의 혜택으로 이 천연가스 매장량이 막대하다. 러시아의 재건에 필요한 재원을 이 천연가스 수출로 충당할 정도. 이에 비해 서유럽은 자원이 빈약하다. 해서 러시아는 막대한 양의 천연가스를 그동안 서유럽 국가에 수출했다. 이 러시아 산 천연가스는 서유럽 국가의 난방 그리고 산업용으로 활용되었다. 지리적 특성상 러시아 산 천연가스의 주요 수출길에 우크라이나가 있다. 러시아는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와 마찰이 생길 때마다 가스관의 밸브를 잠가 버렸다. 물론 러시아도 피해를 보았지만 서유럽 국가는 당장 산업시설이 멈추고 국민들은 겨울에 냉방에서 지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의 가장 큰 고객인 독일은 가스관을 직접 연결하는 노르트스트림1을 설치했다. 이 가스관 설치에 제일 반발한 것은 미국과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서유럽에 대한 영향력 감소를, 미국으로서는 러시아의 서유럽 국가에 대한 영향력이 증대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미국은 서유럽 동맹에 막대한 가스를 수출했다. 하지만 러시아산 천연가스는 지리적 여건으로 미국산보다 유용했다. 미국이 반발했지만 러시아와 유럽, 특히 독일 주도의 노르트스트림2 설치 계획이 발표되면서 공사는 시작되었다. 미국의 공식 반대에도 불구, 독일은 이를 내정간섭이라 여기며 러시아와 직접 협력 입장을 고수했다. 이미 2012년 노르트스트림1은 설치되어 가동 중이며 여기에 더해 노르트스트림2 건설을 주도한 것은 독일이다. 독일은 2000년 당시 슈로더 총리가 이미 탈원전을 선언하며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확대시켜 왔고 노르트스트림2 건설도 2021년 완공했다. 발트해를 통해 러시아 북부와 독일을 직접 연결하는 이 거대한 해저 가스관은 길이가 무려 1200여km에 가스 공급량은 연 550억 입방미터. 약 13조 원이 투입된 이 가스관으로 독일은 자국 가스 필요량의 약 50%를 러시아로부터 공급받으려는 계획이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이를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를 이유로 반대했다. 물론 지금 러시아의 천연가스 수출 라인은 노르트스트림을 제외하고도 몇 개가 더 있다. 1997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러시아-벨라루스-폴란드-독일을 경유하는 야말 가스관과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가스관이다. 러시아가 이 가스관들의 밸브를 잠가버리면 유럽은 큰 곤란에 직면하게 된다. 이미 작년 천연가스 가격이 연초에 비해 800% 폭등하는 직격탄을 맞은 바 있다.

지난 2월7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만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면 노르트스트림2를 끝장내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의 숄츠 총리도 이에 동의했다. 이만큼 가스관은 유럽 각국의 복잡한 이해가 얽힌 존재이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노르트스트림2 가동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포기할까. 국제 정치전문가들은 ‘노’라고 답한다.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노르트스트림보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공급되는 라인이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푸틴은 절대 우크라이나를 그 어떤 것과 대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 유럽의 동쪽 중추인 우크라이나에게 이제 운명의 시간을 다가왔다. 푸틴은 돈바스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면서 우크라이나에 친 러시아 정부를 세울 것이다. 이제 우크라이나에게는 고통의 시간만이 기다리고 있다. 국제 정치에서 무엇보다 우선되는 자국 우선주의, 그리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 때문이다. 힘이 먼저인 세상이다. 우크라이나 내에서도 ‘우리가 너무나도 순진하게 핵무기를 포기했었다. 만약 우리가 지금도 1800개의 핵탄두를 갖고 있다면 러시아가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제 우크라이나 문제는 단순히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우크라이나보다 더 복잡한 각국의 이해관계가 집약된 우리에게도 언제든 닥칠 문제이기 때문이다.

[글 조영원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20호 (22.03.1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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